15
신입 사원의 목격 2
코마다 씨와 사이카와 씨. 한밤중 셋이 우동을 먹고 난 다음날. 오전엔 속옷 업체 프레젠테이션에 동행하게 되었다. 마츠바라 씨가 도입부를 말하고 이번에 내려온 과제를 정리한다. 이어서 전략과의 선배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어필 포인트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제작 선배가 구체적인 광고 비주얼과 PR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의 트레이너는 엄청나다. 프레젠테이션 이후 임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일말의 당황도 않고 우아하게 대답한다. 전략과와 제작과 사람들도 그 대답에 수긍하는 듯하여 마츠바라 씨가 얼마나 신뢰받는 인물인지 깨달았다. 언젠가 나도 저런 자리에 서게 될까 기대와 불안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한편, 사이카와 씨는 어떤 프레젠테이션을 할지 생각한다.
“….”
곧게 뻗은 등줄기와 한 성격 할 것 같은 눈을 떠올린다. ….아. 안돼, 안돼. 언더독이 될 순 없지. 1
프레젠테이션을 같이 한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러 스테이크 가게에 가서 가벼운 회의를 한다.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위하여 어젯밤 늦게까지 야근을 했던 사람은 나와 마츠바라 씨 외에도 더 있었다. 아래층에서 마지막까지 기획 세부사항을 정리하던 사람.
“앗, 마츠바라 씨는 학생 때 카미야 씨와 사귀셨었나요…?”
“그래. 얼마 전까지 하야만을 넣고 헤어나올 수 없는 삼각관계냐는 소리를 들었지.”
“몰랐습니다…”
저는 못 들었다구요!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얼굴로 마츠바라 씨를 보니 그녀는 작게 콧방귀를 뀌곤 냅킨으로 입을 닦는다.
“오래된 이야기는 잊어버렸어.”
“아, 지금은 제약회사 주임과 좋은 분위기를 풍겼지?”
“그것도 처음 듣습니다…!”
“노나미, 미끼 물지 마. 그것도 옛날 이야기야.”
“….”
왠지 건드리면 안될 것 같다. 나의 트레이너는 지뢰가 너무 많다.
“….언더독은 필요 없어.”
“….”
마츠바라 씨의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 확실하게 들렸다. 마츠바라 씨는 나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 마츠바라 씨, 고기 다 익었어요!”
“아직이야. 미디엄 웰던까지 기다려.”
고급 스테이크에 입맛을 다시며 허물없는 이야기를 한다. 평소라면 이런 곳에서 사이카와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캐묻고 다니지만, 오늘은 묻지 않았다.
느긋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오니 영업 2과는 여전히 바빴다. 보드를 확인하니 사이카와 씨는 내객으로 응접실에, 하나무라 씨는 고객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전화로 임시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선배는 전화로 협력 회사와 말다툼이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젊은 선배는 전화로 누군가에게 ‘죄송합니다, 회의를 20분 정도 늦출 수 있을까요’하고 양해를 구한다.
“….”
너무 바쁜 거 아닙니까? 사내 분위기에 눌려 잠시 멍해진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네?”
옆을 보니 마츠바라 씨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말한다.
“정시에 퇴근해도 돼. 나도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야.”
“하,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요? 하지만 나의 말은 마츠바라 씨가 막았다.
“자기관리가 중요해. 잠이 부족하면 효율도 떨어지고 구멍내기 쉬워. 그 상태로 야근했다가 월급 도둑 되니까 그냥 퇴근해.”
“….네.”
또 이 사람은 알기 어려운 다정함으로 아니, 오히려 알기 쉬운가…? 쉽게 사람을 설득한다.
몸이 잠시 움찔하는 게, 잠이 부족한 모양이다.
마츠바라 씨의 말을 받아들여 정시에 퇴근하기로 하고, 일을 정리한다. 제작사에서 보내온 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TV 광고 HD테이프를 꺼낸다. 40개 이상 들어 있는 테이프를 방송사 목록을 보며 각각 보낼 준비를 한다. 작업대에서 테이프로 포장하다가 문득 하나무라 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사이카와 씨가 일찍 퇴근시켰지만, 오늘은 생기가 넘치고 전화 받는 목소리도 밝았다. 어제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이카와 씨는 뭔가 알고 있겠지.
사이카와 씨에게 왔던 LINE, ‘냉장고에 넣어둘게.’ 그걸로 확신했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돌아가고 싶으셨구나. 우동을 작은 걸로 먹었던 이유가 있었다. 밥을 지어놓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둘은 같이 살고 있겠지. 동거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한 집에 같이 머물 수 있는 사이라고.
저것 좀 보세요! 누굴 향해 말하는 건 아니지만 말하고 싶다. 거 봐요, 제 예상은 대체적으로 맞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완성되었다. 정말로 부부라는 증거까지는 찾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단순한 동기사이도 아니고, 사이카와 씨가 일방적으로 하나무라 씨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역시 처음 입사해서 본 하나무라 씨의 손을 잡고 멋지게 웃는 사이카와 씨와 부끄러운 듯한 하나무라 씨는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자, 봐요. 자……
집에서 기다리는 하나무라 씨의 라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정말이지, 오늘은 빨리 자야겠어.)
아무래도 어젯밤부터 머릿속이 이상하다. 지금까지 사이카와 부부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정보를 모아왔으면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좋았다?’ 이상하잖아. 그건. 야근이 사람을 망가트렸구나. 다시 묵묵히 광고 소재 포장을 하다 보니, 하나무라 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인쇄 오류요….?”
….오우. 왠지 불온한 키워드인데 그거.
잠시 하나무라 씨를 살펴보니 그 후 3통의 전화를 걸어 입고를 멈추고 인쇄 내용을 확인하고 수정을 요청한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걸 보면 큰일은 아닌 것 같지만 악재는 겹치는구나…
그러던 사이 시간은 4시. 부회가 시작될 시간이다. 긴급 대응에 대비하여 하나무라 씨를 2과에 남겨두고 다른 2과 사람들은 회의실로 이동하였다.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앞에 앉아있는 사이카와 씨를 보고 오늘 부회의 메인이 사이카와 씨의 사례발표라는 것을 깨닫는다. 학교처럼 스크린을 향해 나란히 세워진 좌석중 맨 앞자리. 인기 없는 앞자리에 신입이 앉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응. 엄청 자연스러워. 그렇게 자신에게 변명하며 맨 앞 가장 왼쪽 자리에 앉는다. 좌석이 사람보다 많아 아니나 다를까 앞줄은 맨 왼쪽 말고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시작되고나서 5분정도 부장은 예산 성취도 보고를 하고 마이크를 사이카와 씨에게 넘긴다. 스크린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 위 마이크 스탠드에 마이크를 고정하고 말을 시작한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다. 낮고 점잖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진정좀 해라. 내가 무슨 연애 스위치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왜이리 들떠있는 거야.
“사흘 전 부장이 다음 부회에서 광고 사례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메일로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어떤 광고 사례인가 질문하러 갔더니 뭐든지 상관없으니 맡기겠다는… 억지가 날아왔습니다.”
회의실이 웃음으로 가득 찬다. 서른을 앞둔 남자의 익살스러운 웃음. 처세술이니까 설레는 건 말도 안되지. 앞자리에 앉아 성실하게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만, ‘타 대리점의 탈취에 연결되는 web 제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
앞줄 구석은 사이카와 씨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어, 나는 투명인간이 되어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기분이 되었다. 처음 인사를 하러 갔을 때와 같다. 오똑한 콧날과 죽 찢어진 눈. 기분 좋게 웃는 입 꼬리. 와이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적당히 근육진 몸. 가늘고 긴 손가락. 가끔씩 보이는 책략가의 눈.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 사이카와 씨의 발표는 상당히 호평받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부회가 끝나고 저녁 5시 반. 자리에 돌아와보니 옆에 있던 하나무라 씨는 인쇄 오류에 대한 문제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같이 부회에서 돌아온 사이카와 씨에게 보고하는 걸 보니 어제 사이카와 씨가 밤 늦게까지 고생하며 만들던 여관 체인 자료가 오늘까지라던 게 생각난다. 사례 발표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나무라 씨도 악재가 겹쳐 있었다…
지금 나는 두 사람과 같이 하는 안건도 없고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퇴근하기엔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두 사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가까이 다가간다.
“저…”
도와드릴 일 있나요? 업무 보고를 하는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미안, 노나미.”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의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예쁘장한 얼굴을 약간 찌그러트린 마츠바라 씨가 있었다.
“지금 클라이언트한테 전화가 왔어. 오늘 프레젠테이션 결과.”
“아.”
벌써 말입니까. 마츠바라 씨는 나보다 빠르게 말한다.
“다시해달래.”
“….다시?”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와 다른 한 곳. 결정하기 어려워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번 더 해달래.”
“그거 언제까지인가요?”
“다음주 수요일.”
절망적이다. 경험은 별로 없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일찍 퇴근하라 해놓고 미안해. 지금 회의 갈 수 있어?”
“괜찮습니다.”
“미안해. 방향성 정하고, 담당자한테 부탁하고… 그러면 오늘 막차는 탈 수 있을 거야.”
“네.”
‘아. 막차를 타야 한다.’ 그 말은 입 안에 담아두자. 신입 노나미. 한가지 몸소 느꼈습니다. 악재는 겹치고, 계속 이어집니다.
오후 8시.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회의가 끝나고 다시 자리에 돌아온다. 2과에는 외근에서 돌아온 선배들이 있어 낮보다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노나미, 나누자. 아까 정한 추가 제안 매체말인데, 옥외 광고만큼 매체 담당자에게 발행 부탁좀 해줄래?”
“네.”
“나는 다른 걸 발행하고… 아, 그리고 아까 말했던 크리에이티브 건, 전차 스티커 광고. 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슬라이드에 정리해줘. 이건 오늘 안 해도 돼.”
“알겠습니다.”
안건을 칭찬받은 게 좋아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막으며 컴퓨터 스크린 세이버를 해제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회의가 끝난 듯한 사이카와 씨가 돌아온다. 노골적으로 쳐다볼 순 없지만 등 뒤로 지나가는 그를 의식한다.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작은 한숨소리가 둘. 그리고 작은 웃음소리가 둘.
“안되겠다. 손도 못 댔어.”
“정말로. 공유 폴더에 들어있는 게 최근 거죠? 30%정도 완성된 겁니까.”
“잘 봤네. 맞아.”
가벼운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무라 씨가 말한 ‘30%’로 미루어 보아 밤 늦게까지 야근할 듯한데 어째서인가 조금 즐거워 보인다.
“일단 자료실에 갔다 올게요.”
“어?”
사이카와 씨의 약간 놀란 목소리에 그쪽을 보게 된다. 돌아온 직후 자리에 앉지도 못한 사이카와 씨가 의자에서 일어선 하나무라 씨를 내려다 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을 신경 쓰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2과 전체가 두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나무라 씨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사이카와 씨를 마주본다.
“네?”
“아니, 왜 자료실….가느냐고.”
“필요하잖아요? 옛날 신문 원고. 지금 사장이 현장에서 만든 신문 광고 자료 안에 넣어야 하지 않나요?”
“아아, 응….”
“그때의 광고 소재는 데이터 베이스로 저장되지 않기도 하고, 자료실에는 예전의 전국 신문 판본이 있을 테니 찾아보면 나올 겁니다.”
“….응. 그런데 그거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자료에는 한마디도 안 썼어.”
“네?”
그럼 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무라 씨가 앞을 내다본 거야? 주변사람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진 것 같았다. 이것이 사이카와 부부라고 불리는 이유.
“하나무라 씨, 자.”
사이카와 씨가 하나무라 씨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다. ….설마 지금 술자리도 아닌데 키스하진 않겠지? 보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하다. 2과 전체의 이목이 끌린 가운데 사이카와 씨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다.
“지금 엄청났어. 너무 잘 알아. ….아아, 사랑스러워 하나무라…..”
“…뭐예요, 사이카와 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얼마나 오래 사귄 사이……”
“사랑해.”
…….어라? 가슴이 아프다? 이건 그저 부부의 재주. 철판 가십.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그렇게 생각하며 시야 구석에 하나무라 씨를 껴안는 사이카와 씨를 남겨두고 컴퓨터를 본다.
“….”
“딴 데 가서 하세요.”
옆자리의 마츠바라 씨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사이카와 씨가 장난스럽게 ‘죄송합니다. 너무 감동스러워서요.’라고 하고, 하나무라 씨는 ‘자료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심장이 아프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카와 씨가 노트북을 들고 자료실로 향하는 기색을 그저 등 뒤로만 느끼고 있었다.
그 후 2시간 정도 지나 밤 10시. 사무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남아있다. 나는 마츠바라 씨가 부탁한 옥외 광고 발행을 마치고 칭찬받은 안건을 제안서에 정리하고 있었다. 이건 내일 해도 되는 일이니 사실 퇴근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노나미, 사양 안 해도 돼. 먼저 퇴근해.”
“아닙니다. 이틈에 다 해버리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더 이상 말 안 할게.”
마츠바라 씨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제안서를 크게 수정한다. 걱정해주시는 마츠바라 씨에게는 죄송스럽지만, 나는 정말로 사양하는 게 아니다. 지금 회사를 나와 혼자가 된다면 생각해서는 안될 일을 생각할 것만 같았다. 졸리긴 해도 일에 집중하는 게 좋다.
하지만 그 집중력도 속닥거리는 목소리때문에 끊겨버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흡연실 단골 선배 두명이었다.
“….그때부터 한번도 안 돌아왔지?”
“그래… 아직도 자료실인가.”
“그렇겠지? 그런데 지금 자료실에 사이카와랑 하나무라 말고 누가 더 있나?”
“몰라.”
“뭐야… 그 소문이 사실이면 지금….”
….쓰레기.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만좀 하지. 그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려고 한 순간 코마다 씨가 그 두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신경쓰이면 확인하러 가봐.”
“예?”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뒤에서 수군거리지 말란 말이야.”
….말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친다. 코마다 씨는 의외로 상식적인 분이셨네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대화 하던 선배는 코마다 씨를 돌아보며 불평한다.
“아. 그럼 코마다 씨가 보고 와주세요. 저는 목격자가 될 용기 없습니다…”
“안 가, 멍청아. 대선배한테 어딜 감히! 이런 건 아랫것들이 다녀와야지.”
“….아랫것?”
아. 세상에. 서둘러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코마다 씨와 선배들의 대화를 주시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선배들과 눈이 마주쳤다.
“다녀와줄래? 노나미!”
걸렸다!
“시, 싫어요! 저도 목격자가 될 용기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번 속는 셈 치고 갔다 와줘. 눈치 없는 척하고!”
“싫다니까요….!”
“갔다 와, 노나미. 어차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니까. 선배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라도 다녀와.”
“그러면 코마다 씨가 다녀오세요!”
“대선배 부려먹지 마! 자, 빨리 가.”
횡포다…!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나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마츠바라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질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의 기대를 짊어지고 자료실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늦은 밤 10시 복도를 걷는다. 멀리 보이는 문 근처의 조명과 창 밖에서 들어오는 외부의 불빛만이 비춰지는 이 복도는 너무 어둑해서 더욱이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정말로 안에서 신음소리라도 들리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그러진 않겠지? 하지만 마음이 무겁다.
자료실은 탈의실을 지나 더 먼 곳에 있다. 내가 입사하고 마츠바라 씨가 안내해준 이후로 이곳에 오는 건 2번째이다. 전략과 사람들은 통계 및 소비자 데이터를 찾으러 자주 이용한다고는 하지만, 영업과는 별로 갈 일이 없다고 들었다. 설마 이런 이유로 올 줄은 몰랐지만….
살짝만 보고 돌아가자. 가벼운 한숨을 토해내고 커다란 문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밀었다.
“….”
자료실에 불이 켜져 있다.
“….”
청각을 곤두세우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살며시 문을 닫고 주변을 둘러본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지?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본다. 키보드 소리는 좀 더 안쪽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자료실 구석진 곳에 있는 책장에는 신문 축쇄판이나 연감 등 언제 쓰는지 모를 오래된 자료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먼지 쌓인 종이 냄새가 난다. 키보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내가 있다는 걸 모르는지 그 소리는 일정하게 반복된다.
여기다. 책장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살짝 훔쳐본다.
“…….뭐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내가 그렇게 묻자 벽가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이카와 씨는 검지를 입에 대고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깨우지 말라는 뜻이겠지. 사이카와 씨의 옆에는 하나무라 씨가 비슷하게 앉아 어깨에 기댄 채 그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사이카와 씨는 조용히 말한다.
“누가 보고 오라고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한 소문이 있었지.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데. 서러워라.”
“….성실하게?”
잠시 그의 어깨에서 순진한 얼굴로 잠을 자는 하나무라 씨에게 시선을 돌린다. 사이카와 씨는 그걸 보고,
“아아, 귀엽지. 내 아내.”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어깨에 기댄 하나무라 씨의 앞머리에 입을 맞춘다. ….항상 하던 보여주기 식 연기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조금 민망하다. 안돼.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데요.”
“노나미 씨는 감이 좋아서 무서워.”
“정말로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남 같지 않은 것 같아서…”
“부부는 남이야.”
“…..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이카와 씨가 하나무라 씨의 앞머리에 입술을 가까이 한 채 눈을 가늘게 떴기 때문에.
아. 안돼, 안돼, 안돼. 참아. 표정 숨겨. 하지 마.
“….응?”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앞에서 몸을 웅크린다. 사이카와 씨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같은 높이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마츠바라 씨의 말이 맞았다. 수면 부족은 사고를 망가트린다.
“….왜 그래, 노나미 씨.”
“….쓸 데 없는 말 해도 될까요. 사이카와 씨, 저,”
언더독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다.
“사이카와 씨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咬ませ犬(무는 개, 사기충전을 위해 투견을 무는 약한 개. 통칭 언더독...이라함.) [본문으로]